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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부정공>자하거사휘언섭(연언)행장(梓下居士諱彦燮(淵彦)行狀)
梓下居士諱彦燮行狀 公諱彦燮字士準梓下其號也趙氏貫玉川遠祖諱璋麗朝大將軍歷版圖判書四傳而至諱瑜號虔谷文科副正當麗社屋守罔僕自靖我 太宗徵以漢城尹不就 世宗命旌閭孝子以前副正三字褒忠節生二男諱斯文 贈叅議諱崇文號竹村官兵使 世祖丙子與六臣同日殉節後 贈兵判諡節愍生諱哲山號龜川隨父同殉後 贈童蒙敎官父子併享莊陵壇及謙川祠東鶴寺肅慕殿子諱瓊號杜門子諱碩珩啓功郎四傳而至諱晋老禮賓寺別提無嗣以族侄琯繼後即叅議公九世孫進士月川公諱時述孫也子諱耘畹子諱在壽子諱泰錫號龜溪以學行載三綱錄及昇平誌子諱秉憲號警菴弱冠就學蘆沙奇先生之門未幾先生歿復執贄于勉菴崔先生所著文集許多藏于家參奉崔永祚撰碣銘妣尚州朴亨材女高宗甲子十二月十二日生公于黃田乾川第自幼甚聰敏孝友性篤就學不煩程督而自能刻意成童前與從伯晩翠公讀書山房四書三經己能沒註遍誦一時才名播多時與李承旨最承蘇山安成煥爲講習之友丁丑中昇補試治經于泮宮及試未之中于時世己澆簿科第皆出於干屬而不出於公矣公痛憤于此遂絶意赴擧卷而懷之而存心剛直不取害理終老林下而止人皆惜其以有用之才生値不辰矣其於事親之節以家貧未得必有酒肉之養至於養志不有愧于古人丁亥遭内憂哀毀踰禮顧以父在故常自強加蔬食以中年遊學四方久闕定省倍加哀痛自以爲天地間一罪人海一道淚輒涔涔傍人爲慟情與五弟甚友愛雖相析著分爨之後六家男婦只有相好之情而無一䦧墻之語者皆公以身先之而化導及人之致也庚申丁外艱哀幾滅性執喪遵禮雖酷炎大署未嘗解首腰之絰嚴雪寒永未嘗廢晨昏之哭時己老年三年不御酒肉以終制人皆稱孝服闋後始廣訪親戚故舊往至蘆嶺下湖西之地方奇崔兩先生之後承以講世誼而相有往復焉以敎導後進爲己任遠近從學者雖至舍不能容而亦不之拒皆諄諄敎導所居鄉坊文風大開嘗與族大父石汀公寅錫黙齋柳相基梅史梁箕黙爲道義交相乃與書牘不絶爲莫逆友自亡國之後謝絶世事惟以課農課兒杜門不出足跡更不踏一舍之地而終身焉蓋公之志行梗槩其謂敦厚君子非爲溢辭也戊寅九月十日以老患終享年七十五葬于廣州橋上蛤沼上乙坐原齊木川張萬烈女忠毅公潤后和順貞淑配德無遠先公十四年乙丑十一月十九日卒墓祔左生二男長重明次重杸孫益勲重明出容勲重杸出餘繁不盡錄日再從弟重明弁首謂余曰先考府君懿德善行未能及時記之懼夫愈久而愈忘玆以請於兄顧余雖不文其在子侄之親自幼承警咳薰德化而知公之詳則有矣謹摭梗槩如右俾以藏之以俟知德君子之言云 旃蒙作噩清明之日 從姪 重九 盥手敬題 자하거사휘언섭행장(梓下居士諱彦燮行狀) 공의 휘는 언섭이요, 자는 사준(士準)이며, 자하는 그 호이다. 옥천 조씨의 원조 휘 장(璋)은 고려조 대장군에 판도 판서를 지내고 四전하여,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이요, 문과 부정으로 고려 사직이 그침에 절의를 지켜 충성을 바쳤다. 조선 태종이 한성윤으로써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니 세종이 정려를 명하되 효자 전부정 三자로서 충절을 정포하였다. 생휘 사문(斯文)은 증 참의요, 숭문은 호가 죽촌이요, 벼슬은 병사로 세조 병자년(丙子年一四五六)에 육신(六臣)과 더불어 순절하니 후에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절민이라 시호 하였으며, 생휘 철산(哲山)의 호는 귀천이요, 아버지를 따라 함께 순절하니 후에 동몽 교관을 증직하고 부자가 함께 莊陵壇 및 겸천사와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하였으며, 휘 경(瓊)의 호는 두문이고 생휘 석행(碩珩)은 啓功郎이며 四전하여, 휘 진노(晋老)는 예빈시 별제로 아들이 없어 족질 관(琯)으로 계후하니 곧 참의공 九세손 진사 월천공 휘 시술(時述)의 손자이다. 생휘 운원(耘畹), 생휘 재수(在壽), 생휘 태석의 호는 귀계요, 학행으로서, 「삼강록」 및 「승평지」에 실려 있다. 생휘 병헌(秉憲)의 호는 경암인데 二十세에 蘆沙 奇선생의 문하에 취학하였는데 얼마 아니되어 선생이 별세하자 다시 폐백을 가지고 勉菴 崔선생 문하에 배워서 저술한 바 문집이 많이 수장되어 있는데 참봉 최영조(崔永祚)가 갈명을 찬하였다. 비는 상주(尚州) 박형재(朴亨材)의 따님으로 고종갑자년(甲子年一八六四) 十二월 十二일에 공을 황전 건천 본가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심히 총명하여 효도하고 우애한 성품이 독실하고 글을 배우며 자주 工程에 대한 독려를 아니해도 스스로 능히 뜻을 새겼다. 成童 전에 종형 만취공과 더불어 산방에서 글을 읽으며 사서 삼경을 이미 소주까지 두루 외우니 한 때 才名이 파다 하였다. 때에 이승지 최승(最承)과 소산 안성환과 더불어 강습한 벗이 되어 정축년(丁丑年)에 보시에 들어 태학에서 경전을 다스리는데 시험을 당하여 합격을 못하였다. 그때에 이미 인정이 비박하여 시험 문제가 다 이속에게서 나오고 공정하게 나오지 아니하므로 이를 통분하여 마침내 과거 공부에서 뜻을 끊고 마음을 강직하게 가지며 의리에 해로운 것은 취하지 않고 임천에서 일생을 마치니 사람이 다 그 쓸만한 재주로 때를 잘못 만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 어버이 섬긴 절차는 집이 가난하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봉양하고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뜻을 기르었다. 정해년(丁亥年)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고 헐기를 예에 지나치게 하였으나 부친이 계신고로 억지로 소식을 더하였으며, 중년에 사방에 유학함으로 오랫동안 문안이 궐하였으므로 애통함이 배나 더하고 스스로 천지간에 하나의 죄인으로 자처하여 매양 한줄기 눈물을 줄줄 흘려 보는 사람이 슬퍼하였다. 다섯 아우와 더불어 심히 우애하여 비록 서로 분가한 뒤에도 여섯집 내외가 다만 서로 좋아한 정이 있어 한번도 담안에서 다툰 기색이 없는 것은 다 공이 먼저 행하고 사람을 교화한 소치였다. 경신년(庚申年)에 외간상을 당하여 슬픔이 거의 성정을 끊게되고 예에 따라 집상하며 비록 혹독한 더위에도 일찍 수요질을 끄르지 않고 엄한 눈보라치는 겨울이라도 일찍 밤과 새벽의 야곡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늙은 나이에도 三년을 술과 고기를 대하지 않고 상을 마치니 사람이 모두 효자라 칭하였다. 복벗은 뒤에 널리 친척과 고구를 찾아 노령에 이르러 호서지방으로 내려가 최면암 선생과 노사 선생 양선생의 후손을 찾아서 세의를 강구하고 서로 왕래가 있었으며, 후생을 교도함으로써 소임을 삼고 원근 학자가 수강차 오면 집이 수용하기 어려우나 막지 않고 다 거듭 교도하니 고을에 문풍이 크게 열리었다. 일찍 족대부 석정 인석(寅錫), 묵재 유상기(柳相基), 매사 양기묵(梁箕黙)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어서 서찰 왕복이 끊어지지 않고 막역의 벗이 되었다. 나라가 망한 뒤로 세상을 사절하고 오직 농사짓고 아이를 가르치며 문을 막고 나가지 아니하며 삼십 리 땅을 밟지 않고 몸을 마치었으니, 대개 공의 뜻과 행실 대강을 보아 그 돈후한 군자라 일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인년(戊寅年) 九월 十일에 향년 七十五세로 별세하니, 광천다리 위에 조개 쏘 위 을좌원에 안장하였다. 배는 목천(木川) 장만렬(張萬烈)의 딸로 충의 공 윤(潤)의 후손인데, 화순 정숙하여 배덕이 어김이 없었다. 공보다 十四년 먼저 을축년(乙丑年) 十一월 十九일에 졸하니 묘소는 부좌하였다. 아들은 중명(重明), 중수(重杸)요, 손자 익훈(益勲)은 큰아들 소생이며, 용훈(容勲)은 둘째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하루는 재종제 중명이 머리를 숙여 나에게 말하되 「선고 부군의 아름다운 덕과 착한 행실을 능히 이때에 기록하지 못하면 더욱 오래되어 줄어들까 두려워 이에 형한테 청한다」 하므로 돌아보건대, 내가 비록 글을 못한다 하여도 그 자질로 어려서부터 경계한 말씀을 듣고 덕화에 감화하고 공의 자상한 것을 아는고로 삼가 대강을 위와 같이 가려서 덕을 아는 군자의 말을 기다리기로 한다. 從姪 중구(重九)는 손을 씻고 공손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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